시놉시스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자 킴은 보스니아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행책자를 따라 비셰그라드라는 도시를 찾아간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국경에 위치한 이 작은 도시는 역사적 상흔과 굴곡을 깊이 간직한 곳이다. 킴은 낭만적 분위기의 빌리나 블라스 호텔에 묵게 되지만, 한밤중 알 수 없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다음날 전쟁 중에 이 호텔에서 무슨 일이 자행되었는지 알게 된다. 이 사건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그녀는 더 이상 보통의 관광객일 수도,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프로그램 노트
첫 장편 데뷔작 <그르바비차>로 제56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과 함께 ‘평화 영화상’, ‘에큐메니칼 심사위원상’ 등 무려 3개 부문에서 한꺼번에 상을 받은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은 전쟁의 참혹한 폭력이 여성에게 입힌 상처가 전쟁 이후에도 오래도록 깊고 저리게 지속되는 고통으로 남는다는 것을 고발한 보스니아 감독이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곳인 그르바비차에서 내전 당시 저질러진 폭력의 진실이 또 다른 상처로 후대에 이어지는 폭력의 역사에 대한 <그르바비차>는 보스니아 안에 사는 여성의 시선으로 그 전쟁을 고발한 작품이었다.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인 <그녀들을 위하여>에서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은 그 몸서리쳐지는 내전으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민족과 종교를 앞세운 집단적 광기 아래 2만여 명이 넘는 무슬림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강간당했고, 10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사람들이 학대당한 ‘인종 청소 프로젝트’가 휩쓸고 지나간 그곳,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다시 카메라로 샅샅이 들여다본다. 냉전의 시대가 저물고, 후폭풍으로 몰아친 내전은 끝났고, 참혹했던 역사는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이제 오랫동안 닫혀있던 길이 트이자 이국적 풍광을 즐기고 싶은 외국인들에게 동유럽은 새롭고 흥미로운 관광지가 되었다. 그래서 남반구 오스트레일리아 여성 연극인 킴도 모처럼 혼자만의 휴가를 즐기러 바로 그곳,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찾았다. 경치는 아름답고, 사람들은 친절하며, 숙소는 호젓하니 여행하기 좋은 곳을 잘 찾았다 싶다.
그러나 그 좋은 곳에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온 킴은 자신이 머물고, 걷고, 사진에 담았던 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뒤늦게 제대로 알아본다. 그리고 알게 된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었던 가를. 킴은 다시 짐을 꾸리고 자신이 관광객의 시선으로 보았던 곳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찾아가서 그곳을 보고, 진실을 캐묻고, 카메라에 담는다. 이 두 번째의 여정에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더는 친절하지 않다. 아니, 위협적이다. 알려고 하지 말고 꺼지라고 한다. 자신들이 묻었으니 외부인이 나서서 들추지 말라고 한다.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은 <그르바비치>에서 그곳에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상처를 섣불리 봉합하지 말도록 역사를 되새겼다. 그리고 이제 실제 그곳을 찾았던 주연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 킴 버르코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녀들을 위하여>에서는 그곳을 찾는 외부인조차도 지나쳐서는 안 될 폭력의 역사를일깨운다. 변영주 감독이 <낮은 목소리> 연작에서 일제강점기 군국주의 폭력에 희생된 정신대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듯,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은 자신이 나고 자란 보스니아에서희생된 이름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슬픈 넋들의 이야기를 되살린다. 돌이킬 수 없더라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이안]
야스밀라 즈바니치Jasmila ŽBANIĆ
1974년 사라예보 출생. 예술아카데미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뒤, 장편 데뷔작 <그르바비차>로 200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 미국영화협회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고 40여 개국에 배급되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두 번째 작품 <기로에서>(2009) 또한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되고 많은 수상을 한 바 있으며, 현재 네 번째 장편영화 <러브 아일랜드>의 후반작업 중이다.